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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보도자료

[02. 9. 27.] 최병천씨의 비판입니다.

최병천씨의 비판입니다.
이 글은 여성단체연합이 입법 청원한 성매매방지법안을 전면 비판한 글이다. 필자는 현재의 공창제냐 성매매방지법이냐의논란이 아닌 성매매방지법 자체에 대한 찬/반 대립구도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단체들의 적극적인 ‘반론’을 기대한다.

최병천 민주노동당 당원

군산 화재사건으로 매춘 여성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후 개혁적 여성단체들이 결집한 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은 대안 모색의 일환으로 성매매방지법안(이하 방지법)을 입법 청원한 상태이다. 이런 와중에 김강자 총경이 매춘합법화에 관한 외국사례를 담은 홍보비디오를 제작·배포한 것이 언론에 공개되었고 많은 여성단체들은 김강자 총경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필자는 이 지점에서 매매춘 문제를 접근하는 기본 관점은 여성단체도, 기혼여성도 아닌 오직(!) 매춘 여성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라는 점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서 김강자 총경에 대한 여성단체의 비난이 과연 정당한지 혹은 그들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 더 나아가서 여연의 방지법이 매춘 여성의 인권을 얼마나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매춘 여성의 인권을 위한 새로운 대안을 제출하고자 한다. 사회적 약자의 편이 되는 것은 진보주의자의 양보할 수 없는 근본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선한 의도와 나쁜 방법이 만날 때 *

매춘 여성의 유형은 흔히 둘로 구분한다. 감금, 폭행, 협박, 인신매매에 의한 노예제적 매매춘과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선택하는 생계형(자발적) 매매춘이 그것이다. 올 초 화재사건이 났던 군산 매매춘의 경우 신문보도로 미루어 노예제적 매매춘이었다고 판단된다.

여성단체는 특히 이들 노예제적 매매춘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며 쉼터 운영을 비롯해서 대책수립을 요구하는 실천을 전개했다. 그런 선한 의도의 일환으로 방지법도 입법 청원했다고 생각한다. 방지법의 내용을 보면 노예제적 매춘을 강요받은 여성들은 ‘성매매된 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완전 비범죄화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수준에 걸맞는 사회복귀 지원을 하는 반면, 포주에 대해서는 최고 사형까지 선고하는 강력한 처벌을 골자로 한다.

그러나 ‘선한’ 의도가 반드시 ‘좋은’ 방법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간혹 ‘지나치게’ 선한 의도가 나쁜 방법을 선택했을 경우, 그것은 인간의 존엄을 심각하게 파괴하고 사회를 어둡게 만드는 최악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피해자 없는 범죄’에서 이러한 문제가 나타난다.

‘피해자 없는 범죄’란, 살인·폭력·협박·강간·절도 등과 같이 대부분의 형법상 범죄는 일방적 가해자가 있고 일방적 피해자가 있는 것과 달리, 특별히 피해자가 없음에도 범죄로 규정되는 경우를 말한다. 술·장발·미니스커트·피임·간통·동성애·마약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를 규제하는 것은 개념이 애매모호한 ‘미풍양속’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일 뿐이다.

결국 ‘피해자 없는 범죄’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 ‘권력을 가진’ 대다수 사람들의 ‘도덕적 가치판단’이 반영된 ‘풍속’의 문제에 불과하다.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생계형(자발적) 매매춘의 경우도 물론 여기에 해당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간 호객행위와 광고만을 단속하던 독일 법원은 2000년 12월 매매춘의 전면적 합법화를 선언하면서 “매매춘은 더 이상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로 볼 수 없다”고 규정했던 것이다. ‘피해자 없는 범죄’인 경우, 불가피하게 ‘규제’의 차원에서 불법화할 수는 있다. 그러나 최대한 신중해야 하며 되도록 피해야 한다. 피해자 없는 범죄가 많은 사회일수록 그 사회의 시대적 인식 수준과 인권은 낙후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기서 잠시 매매춘에 대한 금지주의 정책은 왜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80년 전 금주법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20세기 초반 부르주아 여성을 주축으로 한 세계 여성운동은 여성참정권 획득과 금주법 제정운동을 동시에 전개했는데, 상대적으로 여성운동의 파워가 강한 미국에서 1920년에 두 가지가 모두 실현된다. 당시 여성들은 술을 ‘악’이라고 생각했고, 술 먹는 것은 ‘범죄’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금주법 제정을 통과시킨 부르주아 여성들이 술을 악이라고 생각하건 말건 술을 먹고 싶은 사람들은 존재했고, 술을 팔아서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은 숫자로 존재했다. 그래서 그들은 법을 피해서 ‘암시장’을 구축하게 된다. 법령 하나로 그 시대 대다수 인간의 욕망까지 감옥에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술을 먹고 싶은 사람들과 술을 팔아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이 ‘쌍방의 합의하에’ 암거래를 했고, 일반적 범죄와 달리 이것은 경찰에 신고될 이유가 없었다.

결국 법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제3자인 경찰이 단속을 강화하게 된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감시역할을 해야 할 경찰을 감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법적 처벌권의 열쇠가 경찰에게 있기 때문에 그들을 매수할 유인이 발생하고 구조적인 뇌물과 부패가 등장하고 폭력조직이 개입하게 된다. 미국의 전설적 갱인 알 카포네가 금주법 시대에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발적 쌍방거래를 법으로 금지시켰기 때문에 부패가 구조적으로 양산된다는 명백한 인과관계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금주법의 사회적 병폐는 너무도 심각하여 1933년 루스벨트의 집권과 함께 술은 다시 합법화된다. 술을 ‘악’이라고 생각했기에 술을 근절하려고 했던 부르주아 여성들의 지나치게 좋은 의도(?)는, 자발적 시장거래를 법으로 ‘근절’시키려는 나쁜 방법과 만나면서 엄청난 사회적 비용만을 초래하고 종말을 고하게 된다.


* 강제적 인간개조 혹은 감옥으로? *

이런 이유 때문에 경찰이 매춘을 사실상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준 공창제의 나라’라고 비난하는 것은 철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10만 명의 경찰인력과 200만 명의 매춘 여성이 있는 상황에서 경찰이 매춘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기 위해서는 경찰인력을 20배 이상으로 늘리라고 주장하는 꼴밖에 안 되며, 설령 경찰인력을 20배로 늘린다 하더라도 감시자 역할을 하는 경찰을 감시할 수 없다는 문제로 인하여 뇌물구조는 오히려 확대재생산될 것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경찰의 단속을 강화해서 매춘을 ‘근절’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술 먹는 것을 ‘근절’하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끔찍할 정도로 우매한 주장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인과관계가 전도된 인식을 하고 있는 셈이며, 오늘날 오히려 경찰이 합법화를 주장하고 민간단체들이 단속강화를 주장하는 것은 블랙 코미디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여연이 입법 청원한 방지법은 80년 전 여성운동의 ‘성과물’이었던 금주법 제정과 동일한 오류를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 방지법은 생계형(자발적) 매춘 여성에 대해서 ‘성매매행위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1년 이하 징역과 300만 원 이하 벌금이라는 법적 처벌권을 주장하고 있다. 매춘 여성의 인권을 위해서 청원된 법이라는 ‘홍보’와 달리 실제로는 매춘 여성을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이 법은 일단은 노예제 매춘이라도 근절해야 한다는 고뇌의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뜻하는 목적마저도 이루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된다. 노예제 매춘을 당하는 여성이 경찰에 신고를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노예제적 매춘 여성이라는 것을 ‘입증’해야만 ‘법적 처벌권’을 면제받기 때문이다.

결국 현행 윤락행위등방지법이 그렇듯 방지법 역시도 노예제 매춘 여성의 입장에서는 신고할 때의 위험부담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자포자기하게 되는 것이다. 부정부패 때문에 금주법이 실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금주법 때문에 뇌물과 부정부패가 조장되었던 것처럼, 매매춘에 대한 금지주의적 법 정책이 오히려 노예제적 매매춘과 뇌물구조를 조장하고 있다는 이 자명한 인과관계를 여연은 전혀 이해조차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선한 의도가 나쁜 방법과 결합하면 결국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매춘 여성들이 될 것이다.

노예제적 매매춘은 굳이 비범죄화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 자체로 불법이며 원인무효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감금, 폭행, 협박, 인신매매를 합법화하는 경우는 없다. 이것은 일방적 피해자가 존재하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노예제적 매매춘의 근절은 금지주의적 처벌을 강력하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매춘 여성에 대한 ‘법적 처벌권’이 작동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생계형 매춘 여성에 대해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 원 이하 벌금이라는 법적 처벌권이 작동하는 한, 방지법의 의도는 절대로 실현될 수가 없다.


* 김강자 총경이 더 진보적이다 *

방지법에는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생계형(자발적) 매춘 여성들을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제14조 이외에도 심각하게 반인권적인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다.

「윤락여성의 사회복귀를 위한 지원방안 연구」라는 한국여성개발원의 1993년 연구보고서를 보면 매춘 여성의 95% 가까이는 돈을 벌기 위한 생계형(자발적) 매춘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방지법은 매춘 여성의 95%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물론 단 1%의 생계형 매춘 여성이 있을지언정 이들을 감옥에 보내서는 안 된다.

이 밖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방지법의 반인권적 조항은 ▲법원의 판단에 의해 생계형 매춘 여성을 강제입소시키는 조항 ▲조사·심리조항(스탠릭 큐브릭 감독이 「시계태엽장치 오렌지」라는 영화에서 폭로했던 것과 유사하게 매춘 여성을 ‘특별한 정신이상자’로 취급하면서 ‘강제적인 인간개조’를 겨냥하고 있다.) ▲포주에 대한 사형 처벌 요구(인권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제도이기에 프랑스에서는 ‘극우파’ 르펜 같은 정치인이나 주장하는 내용임) 등이다.

그 어떤 범죄자에게도 잘못한 것에 대한 처벌을 할지언정 ‘내면 세계’의 개조를 강제할 수 없다. 그러나 조사·심리조항이라는 미명하에 그러한 것이 법안에 포함되어 있다. 아무리 매매춘 근절을 이데올로기로 가지고 있을지언정 양심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침해하는 준법서약서보다 한술 더 뜨는 강제적 인간개조의 제도화나 사형의 주장은 극우파시스트들에게나 어울릴 주장들이지 여성의 ‘인권’을 위해서 노력하는 여성운동의 본분이 아니다.

매매춘에 대한 정책은 크게 금지주의, 규제주의(공창제), 합법화로 구분된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규제주의와 합법화를 채택하고 있으며 OECD 국가 중에서 공무원노조와 매매춘에 대해 금지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오직 한 나라, 바로 한국밖에 없다. 지나치게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기에 자신들이 선택하는 방법이 나쁜 방법인지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김강자 총경의 행동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춘 여성을 감옥에 보내서는 안 되고, 강제입소시켜서도 안 되고, 최소한의 법적 권리보장을 해줘야 한다는 취지에서 선진국의 합법화 사례를 비디오 테이프로 만들어 배포한 것이, 오히려 매춘 여성을 감옥에 보내려는 법안을 청원한 사람들에 의해서 비난받고 있는 이 기막힌 아이러니를 필자는 몹시도 안타까워하고 있다.

물론 여성단체들의 저항이 워낙 강력하기에 매춘 여성의 인권에 기여를 하건 말건 규제주의와 합법화가 실제로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필자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생계형 매춘 여성을 감옥에 보내고 강제적 인간개조를 기획하고 사형도 거침없이 주장하는 극우파시스트들이나 주장할 만한 법안이 통과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창제(규제주의) 찬/반 대립구도를 ‘우회’해 논의의 초점을 현재 시급하게 불똥이 떨어진 방지법 찬/반 대립구도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와 함께 필자는 민주노동당의 당원으로서 생계형 매춘 여성까지를 포함하여 매춘 여성의 완전한 비범죄화와 포주, 남성만 처벌하는 성구매방지법(안)을 대안으로 제안중인 상태이다. 대안적 모색에서는 앞서 지적했던 현재 방지법에 있는 조항 중, 극우파시스트들이나 주장할 법한 내용은 완전 삭제하는 것을 전제한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보다 더욱 강력한 것은 인습의 이데올로기이다. 필자는 지금 인습의 이데올로기와 정면대결하며 세월을 다 보낼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그래봤자 방지법이 통과해 버리면 그 피해자는 매춘 여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꽃도 피지 못했는데 봄날이 벌써 다 가고 있다. 이 화창한 봄날의 햇살이 노동계급보다도, 여성운동보다도, 결혼여성보다도 ‘더 힘없는’ 매춘 여성들에게도 평등의 이름으로 따사로이 비춰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글을 맺는다.




진중권: 최병천씨의 글, 대체로 무난하다고 봅니다. 생계형 매춘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상황에 의해 강요된 것일 터, 그것까지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도해 보이네요.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