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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 Now/공지사항

30년간 폭력 휘두르던 가장 살해한 모녀... 15년 구형(오마이뉴스)

아버지가 안 죽으면 우리가 다 죽는데..."
[이런 사연] 30년간 폭력 휘두르던 가장 살해한 모녀... 15년 구형
이민정(wieimmer98) 기자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남편을 목졸라 살해한 아내의 행위는 유죄일까, 무죄일까. 최근 가정폭력에 대한 관심은 커지고 있지만 '매맞는 아내, 매맞는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아직 차갑다. 특히 이들의 범죄를 생존을 위한 '정당방위'로 인정하기보다 '살인'으로 바라보는 법집행이 우세한 현실이다.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의 조속한 시행을 위해 12일 여는 배심원제 모의재판에서 가정폭력으로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실제 사건을 다룬다. 9명의 시민 배심원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되는 가운데 <오마이뉴스>는 30년간 가정폭력을 휘두룬 남편을 살해, 재판을 받고 있는 또다른 모녀를 취재했다. <편집자 주>



▲ 지난해 11월 폭력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한정숙(가명)씨가 수감중인 전주교도소 전경. 검사는 지난 6일 한씨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제가 좀 참았으면 될 일을…. 죽은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난 6일 오전 10시 전주지방법원 8호 법정. 판사가 피고인 한정숙(가명)씨에게 마지막으로 자기 변호의 기회를 주자 이같이 말했다. 울먹이는 한씨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또렷했다.

판사는 또다른 피고인인 한씨의 딸 이미영(가명)씨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을 해보라"며 변론의 기회를 줬다. 하지만 이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모녀는 재판장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검사는 한씨에게 "쥐약을 먹인 뒤 수건으로 싼 둔기로 남편을 죽인 것은 잔인하기 그지없다, 딸과 함께 사체를 유기한 것도 범행에 대해 전혀 뉘우침이 없었음을 말한다"며 지난해 11월에 일어난 일을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검사는 이날 구속 상태인 한씨에게는 징역 15년을, 불구속 기소된 이씨는 사체를 옮기는 모친을 도운 혐의로 징역 1년을 각각 구형했다. 재판부는 오는 27일 이들에 대한 선고공판을 연다.

30년간 지속된 남편의 폭력... 딸과 손주까지 폭행하는 남편

한씨가 남편을 살해하게 된 이유는 지난 30년간 남편의 끊이지 않는 폭력 때문이었다.

한씨 부부는 지난 76년 딸 이씨가 생긴 이후 결혼했다. 이렇다 할 돈벌이가 없었던 남편은 일보다는 술에 취해 살았고, 술에 취한 남편의 폭력과 고성은 한씨의 일상이었다.

한씨가 집을 뛰쳐나오지 못한 이유는 딸 이씨 때문. "딸만 시집 보내면 남편에게서 도망가겠다"던 한씨는 이씨가 '이혼녀의 딸'이라고 주위에서 손가락질 받을까봐 남편의 폭력을 혼자 견뎠다.

어린 시절 이씨는 일 나간 어머니가 귀가하기 전 아버지의 방에 이불도 펴놓고 보일러 온도도 올렸다. 술취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지 않고 잠들도록 해야했기 때문. 만취한 아버지는 손에 집히는 물건을 던졌고, 귀가하는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어머니는 코피가 터지기 일수였다.

한씨는 딸에게 매맞는 엄마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아버지를 피해 도망 다니기도 했다. 친척집과 친구집을 전전하다 갈 곳이 없어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집나간 한씨 앞에 싹싹 빌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권했지만, 정작 집으로 돌아온 뒤 폭력과 욕설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씨는 딸이 대학을 졸업하자 곧바로 결혼시켰다. 딸만이라도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구하기 위함이었다. 이씨는 대학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가 휘두른 칼에 찔려 제 손으로 수학능력시험 원서를 쓸 수 없을 정도로 폭력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집간 딸에 대한 한씨의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의 폭행은 사위에게까지 확대됐고,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이씨 부부 또한 지난해 11월, 사건이 있기 보름전에 헤어졌다. 남편의 폭행을 피해 시집 보냈던 딸이 손주 둘과 함께 되돌아온 것이다.

손주까지 다섯 명으로 불어난 한씨 가정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남편은 딸에게 "너네 자식들까지 못 키운다, 나가라"고 다그쳤고, 생활 능력도 없이 술만 먹으면 때리는 남편을 곱게 봐줄 수 없었다.

한씨는 이러다 손주들까지 죽겠다 싶어 자기 손으로 폭력의 악순환을 끊었다. 지난해 11월 26일 저녁 취해서 들어온 남편에게 수면제와 쥐약을 탄 곰탕을 먹였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어 남편의 머리를 둔기로 때렸다. 그리고 딸과 함께 사체를 동네 인근에 버린 뒤 그날 바로 경찰에 자수했다.

"판사님 같으면 어쩌시겠어요?"

한씨는 남편을 살해함으로써 폭력에서 벗어났지만 결국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감옥에 갇혔다. 죽은 남편의 집에서는 "가족이기는 하지만 한씨가 계속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렸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진술서를 재판부에 제출해줬다.

이날 재판은 10여분만에 끝났다. 하지만 이씨는 한 시간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검사가 어머니에게 15년을 구형한 데 놀라 재판을 같이 방청한 여성단체 관계자들에게 "우리 불쌍한 엄마를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만 계속했다.

이씨는 최후 진술에서 침묵한 것이 아쉬웠던지 "판사님을 직접 만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고, 사건 당시 몇 달간 상황이 어땠는지를 말씀드리고 싶다"면서 "판사님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냐고 묻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다 죽는데..."라며 울먹였다.


"폭력피해 여성들의 심정, 재판부는 아시나요?"
[인터뷰] 이미정 전북여연 정책국장






이미정 전북여성단체연합 정책국장은 폭력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한씨에 대해 검사가 15년을 구형하는 순간 한숨을 내쉬었다. 이 국장은 사건 직후부터 변호사 선임과 정신감정 등의 문제에 적극 나서면서 이들 모녀를 돌봤다.

그는 가정폭력 피해자에서 살인 혐의자로 뒤바뀐 여성들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사관, 검사, 재판부가 대부분 남성이라 법적 해석이 남성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며 "살인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대변하려는 폭력 피해자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재판부가 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중형을 준다고 해서 '남편을 죽이면 무서운 벌을 받겠구나'하는 처벌에 대한 경각심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며 "폭력 피해 여성들이 어떻게 치료를 받고, 사회에 다시 적응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국장은 또 치료감호소에 한씨의 정신감정을 의뢰한 것에도 불만을 표시했다. "정신감정도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정도가 다른데, 재판부에서는 치료감호소 외에는 감정을 허가하지 않았다"며 "(여성단체가 추천한) 의사의 특별진료나 국·공립 종합병원의 진료를 받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국장은 "가정폭력을 당했을 경우 경찰이나 상담소 등을 믿고 의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상담원들은 항상 준비하고 있다"며 침묵하는 피해자들이 가정 밖으로 나오기를 호소했다.

전북에는 익산, 전주, 군산 등 피해 여성들이 머물 수 있는 쉼터가 3∼4곳 정도 있지만 대부분 '정원 미달'인 상태. 이 국장의 설명에 따르면, 여성들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문제가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우려해 쉼터 등 외부의 도움을 꺼리기 때문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