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주년기념 여성선언문>
돌아오는 8월 15일, 우리는 민족해방 60주년을 맞이한다. 우리 여성들은 60년의 긴 세월 동안 고난과 영욕의 시간을 보내었다. 외세에 의한 민족 분열과 분단, 인구의 1/10을 앗아간 한국전쟁은 여성에게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동시에 지난 60년 동안 우리는 4. 19혁명, 5. 18 민주화운동, 6월 시민항쟁을 거치면서, 다른 제3세계 국가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민주화를 이끌어내었다. 또한 전쟁의 폐허 속에서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노력한 결과 경제규모 면에서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렇게 일구어온 자랑스러운 역사의 배후에는 여성들이 흘린 땀과 눈물이 있다.
지난 60년은 여성의 지위 면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우선 50년대부터 가족법개정운동은 오랜 세월이 걸려 올해 3월 2일 호주제 폐지로 결실을 맺었다. 1990년대 말부터 여성정책도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하였고, 2001년에 여성부가 설립되었고, 올해에는 여성가족부로 바뀌면서 가족정책까지 포괄하기에 이르렀다.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성폭력특별법과 가정폭력방지법 및 성차별금지법과 성매매방지법의 제정이 이루어졌고, 정치를 포함한 각 분야에서 여성의 진출이 확대되었다. 1970년대 이래 대학에서 진행되는 여성학강좌는 젊은 세대에게 여성주의 감수성을 높이는데 기여하였고, 더불어 인터넷을 포함한 미디어의 확대와 활발한 문화활동을 통해서 여성주의 담론이 크게 확산되었다.
이런 여성지위의 향상은 1980년 말 이래 활발해진 여성운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이런 점에서 여성운동은 스스로의 성과에 대해 크나큰 자긍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간의 여성정책과 여성운동이 만들어 낸 빛나는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에 값하는 실질적인 개선이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여성들은 회의적이다. 남녀 간의 임금격차는 여전하고, 여성노동자의 73%는 비정규직에 머물 정도로 노동시장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열악하다. 이는 지난 10여년 사이에 진행된 세계화의 급류가 한국에서는 여성의 지위를 더 열악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한 정부나 기업과 같은 공적 의사결정기구 내에서 여성은 여전히 주변적이다. 어린이 양육이나 노인부양 및 가사노동과 같은 가족 내 ‘돌봄노동’은 주로 여성에게 전가되어 있다.
적지 않은 한국의 남성들은 여성의 인권을 개선하는 이 새로운 변화에의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남성의 적응불능성은 호주제 폐지, 성매매방지법, 군가산점 폐지의 실행이후 여성정책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주 선정적인 방식으로 나타났다. 이런 저항담론은 이미 달성된 법적, 제도적 개선을 현실화하는데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법적, 제도적 개선 이후에도 가부장적 의식과 문화는 사회 내부에 모세혈관처럼 뻗어 있어서, 새로운 성평등 문화를 창조하는 길은 멀기만 하다.
광복 60주년을 맞이하는 현재에도 여전히 ‘가난의 여성화’현상을 극복하고 소외받는 여성들의 고단한 삶을 해결하고 여전히 잔존하는 성 차별을 해소하려는 지난한 노력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여성들은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전진해야 한다. 이제 여성운동과 여성정책은 새로운 방향모색이 필요하다. 남녀사이에 한정된 자원의 배분을 놓고 진행되는 제로섬 게임도 중요하나, 이제는 여성운동의 시너지 효과를 더 높이는 방향, 즉 성 평등과 대안사회가 함께 실현되는 사회를 전망해야 한다.
여성이 지향하는 대안사회는 물 부족과 기후 온난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져오는 여성의 빈곤화와 성적 상품화, 전쟁과 군사주의의 위협, 민주정치의 실종을 넘어서서, 가장 작은 자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복지사회,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 간의 공존적 삶이 가능한 환경친화적 생태사회, 남녀 모두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권리가 보장되는 평등사회, 국민 모두의 권리와 참여가 보장되는 참여민주주의 사회이다. 또한 여성은 중앙 중심주의를 넘어서서, 지역여성운동과 지역자치를 활성화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아쉽게도 지난 60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공동체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여성정책은 개발과정에서 배제된 여성을 끼어 넣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여성을 배제하는 주류사회의 남성중심성을 전환시키는 성주류화정책으로 진전해야 한다. 이는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이 아니라 양성간의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는 정책을 지향하는 것이다.
또한 여성이 정당한 시민으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는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우리는 사회적 일자리 창출이나 ‘일자리 나누기’ 등의 다양한 전략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는 여성의 삶의 개선 만이 아니라 세계화가 초래한 대량실업과 비정규직화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세계화운동이기도 하다. 특히 ‘돌봄노동’의 사회화는 그간 여성이 담당했던 무보수나 저임노동을 사회화 제도화하고, 돌봄에서 소외된 남성들을 수혜자만이 아니라 시혜자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여성 뿐 아니라 남성 역시도 온전한 시민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돌봄노동의 사회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에 못지않게, 새로이 진행될 ‘일자리 나누기’는 노동의 질을 높이고 남성에게 가사와 양육을 분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평등가족 실현에 기여할 것이다. 여성이 희망하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정상/비정상가족을 가름하는 왜곡된 편견과 관행을 사라지고 평등한, 대안적인 가족이 실현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가올 고령화사회도 대비하고자 한다.
광복 60년을 맞이하여 우리 여성들은 한반도의 평화를 염려하고 있다. 여전히 한반도를 위시한 동아시아는 갈등과 군사대결의 긴장상태에 놓여 있다. 분단 60년은 이 땅을 전쟁 무기와 군사주의로 뒤덮이게 하였다. 우리는 먼저 남북이 화해를 통해 평화공존을 모색하고, 강대국의 간섭 없이 우리의 운명을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여성들은 국방비를 감축하고 여성과 약자를 위한 사회복지체계를 확대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군사주의를 일소하는 것을 통해서 성매매나 성폭력을 위시한 모든 폭력이 사라지고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평화가 깃들기를 희망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북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북한사회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보다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는 북한의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보다 인간적인 삶이 허용되기를 바란다.
광복 60년을 맞이하여 우리 여성들은 이제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60년을 성찰하고,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가야 한다. 이제 갈등과 분열을 넘어서, 보다 인간적인 사회,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대안사회를 실현하자!
2005. 8. 15
한국여성단체연합
남윤인순 정현백 박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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